na-smile 님의 블로그

한국 건축

  • 2025. 3. 29.

    by. na-smile

    목차

      1. 그냥 ‘기둥’이 아니다

       우리는 건축물을 볼 때 보통 ‘전체’를 먼저 본다. 외형이 아름다운지, 지붕이 멋진지, 창문이 많고 구조가 넓은지. 그런데 정작 그 건축물을 수백 년 동안 지탱해 온 핵심 요소, ‘기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기둥은 단순히 건물을 떠받치는 구조물로 보이지만, 전통 건축에서 기둥은 단지 하중을 버티는 나무 덩어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에 목수의 숨결, 시대의 기술, 자연을 읽는 감각, 그리고 인간 중심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 이 글에서는 ‘기둥’이라는 평범한 존재가 어떻게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고, 건축 기술의 정수를 담아냈는지, 전통 건축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2. 기둥은 건축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기둥은 단순히 무게를 견디는 수직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건축의 전체 흐름과 공간의 성격을 결정짓는 출발점이다.

      🔹 기둥을 먼저 세우고, 그에 따라 집이 지어진다

       서양 건축은 ‘벽’을 먼저 세우고 내부 공간을 분할한다. 반면 한국 전통건축은 기둥의 위치와 간격이 전체 건물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한다. 기둥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방이 생기고, 마루가 생기며, 지붕의 곡선까지 바뀐다. 즉, 기둥 하나하나가 건축 설계의 기준이자 중심축인 셈이다.

      🔹 기둥 간격, 단순한 치수가 아니다

       전통 한옥에서는 ‘칸’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한 칸, 두 칸이라는 단위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로 정해지는데, 이는 단순한 숫자 단위가 아니라 사람의 생활 동선과 용도에 맞춘 비례의 미학이다.

      예를 들어, 사랑방은 상대적으로 작은 칸을 두고, 대청마루는 더 넓은 칸을 둔다. 기둥 간격은 곧 생활과 건축의 조화를 표현하는 설계 기준이다.

       

      기둥 하나에 수백 년의 기술이 담겨 있다면 믿겠습니까?

       

      3. 기둥이 전하는 자연과의 대화

       전통 건축의 기둥은 ‘인공’보다 ‘자연’을 우선시한다. 자연에서 자란 나무를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사용하는 방식은 기둥 하나하나에 자연의 질감과 호흡을 그대로 담아낸다.

      🔹 둥근기둥 vs. 각진 기둥

       한옥의 기둥을 보면 대부분 ‘둥글다’. 이는 단지 미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둥근기둥은 힘의 분산에 유리하고, 자연스러운 나무의 형태를 최대한 살린 결과다. 나무는 본래 둥글게 자라므로, 그것을 그대로 활용하면 최소한의 손질로 최대한의 강도를 유지할 수 있다.

      각진 기둥은 건축에서 시각적 정렬감은 있지만, 구조적 탄성은 둥근기둥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 전통 한옥에서는 이 점을 고려해, 주요 구조물은 둥근기둥으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 나무의 결을 읽는 장인의 기술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목수는 나무의 나이테, 수분 함량, 성장 방향을 살핀다. 한쪽으로 휘어진 나무는 그 방향에 맞춰 설치하거나, 구부러진 부분이 하중을 견디는 데 유리한 위치에 배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둥은 인위적인 철근보다 유연하고, 오히려 더 오래 견딘다.

       

       

      4. 못 없이, 기둥을 고정하는 법

       전통 건축에서 기둥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박는 게 아니라, 기단 위에 얹힌다. 처음엔 이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다. "기둥이 땅에 고정되지 않으면 쓰러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백 년 된 궁궐과 사찰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이 구조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증명한다.

      🔹 떠 있는 듯, 고정된 기둥

      기둥 아래에는 ‘주초석(柱礎石)’이라는 평평한 돌이 놓인다. 나무 기둥은 이 돌 위에 살포시 얹히는데, 결코 접착제나 못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게와 구조의 압력, 위쪽 구조물의 하중이 균형을 잡아줘서 기둥은 절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지진이나 바람이 불어 흔들려도, 기둥 자체가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여유 공간’을 가지므로, 충격을 흘려보내고 복원하는 능력이 있다. 현대 건축에서 말하는 내진설계의 핵심을, 전통 기둥은 이미 실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5. 기둥 하나가 공간의 성격을 바꾼다

       기둥은 단지 구조를 위한 요소가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와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장치다. 같은 크기의 방이라도 기둥의 굵기, 간격, 배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 기둥의 개수로 공간을 나눈다

       한옥에는 벽이 없어도, 기둥만으로 공간을 분할하는 설계가 많다. 마루와 대청 사이, 대청과 안방 사이에 문이 없어도, 기둥을 기준으로 ‘이곳은 거실’, ‘여기는 안방’이라고 인식된다. 이는 현대식 파티션이 없이도, 시선과 동선으로 공간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방식이다.

      🔹 기둥의 비례, 인간 중심의 건축 미학

       기둥은 높이와 굵기가 중요하다. 전통 건축에서는 기둥의 높이와 사람의 키, 시선, 손의 높이 등을 기준으로 비례의 미학을 구현했다. 너무 높으면 위압감을 주고, 너무 낮으면 답답하다. 그래서 전통 목수는 항상 ‘사람의 중심’에서 기둥을 바라봤다.

      기둥 사이를 지나는 바람, 기둥을 중심으로 앉는 사람들, 그 옆에 놓이는 가구까지… 전통 건축은 기둥 하나를 기준으로 사람과 자연, 공간이 조화를 이루게 설계되어 있다.

       

       

      6. 500년이 지나도 살아남은 기둥들

       지금도 전국 곳곳에는 수백 년을 버텨낸 목조 건축물이 존재한다. 그 안에는 수십, 수백 개의 기둥들이 여전히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물리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의 층을 간직한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 경복궁 근정전의 기둥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에는 무려 48개의 기둥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부의 기둥 4개는 붉은색 칠이 되어 있는데, 이는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기둥은 구조를 넘어서, 사회적 상징까지 담는 기능을 한다.

      🔹 종묘의 목조 기둥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는 수백 년간 왕과 조상을 모셔온 신성한 공간이다. 이곳의 목조 기둥은 단 한 번도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지 않고도 유지되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기둥을 제대로 다듬고, 제대로 세웠기 때문이다.

       

       

      7. 결론: 건축은 결국 ‘기둥 철학’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건축을 바라볼 때, 외형의 아름다움이나 최신 자재, 스마트한 기능에 먼저 눈이 간다. 하지만 정말 오래가는 건축,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 건축은 보이지 않는 중심이 튼튼한 건축이다. 바로 ‘기둥’이 그 중심이다. 전통 건축에서 기둥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 한 그루의 생애를 담고, 목수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다. 잘려 나간 나무가 다시 뿌리를 내려 수백 년을 버틴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한 증거다. 기둥을 통해 우리는 옛 건축가들이 어떤 철학으로 집을 지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효율보다 조화, 속도보다 흐름, 강함보다 유연함을 추구했던 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법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 기둥 하나에 수백 년의 시간이 담길 수 있었던 진짜 이유다.

      오늘날 우리는 집을 너무 빠르게 짓고, 너무 쉽게 허물고 있다. 효율성과 경제성, 편리함만을 좇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 남지 않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전통 건축의 기둥은, 시간이 지나도 사람의 마음을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혹시 지금 내 공간을 다시 만들고자 하는가? 꼭 한옥을 짓지 않더라도, ‘기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 보라.
      그 기둥이 곧 나의 삶의 방향이고, 집의 성격이며, 공간의 본질이 된다. 기둥 하나를 세운다는 건 단순히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어떤 철학 위에 세울 것인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기둥 하나에 수백 년의 기술이 담겨 있다는 말, 이제는 기술을 넘어, 삶의 지혜와 마음의 중심이 담겨 있다는 말로 들릴 것이다.